<인형의집> 여성에서 우리로의 확대경

<인형의집> 여성에서 우리로의 확대경

인형의 속성을 생각해볼 때 인형이 인형인 이유는 인형 스스로 정체성을 갖지 못함에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이 타자를 통해 형성되었다면 그 무엇이라도 인형이라 불릴 수 있다. SNS는 이 시대에 가장 커다란 인형의 집이다. 타자가 클릭하는 ‘좋아요’의 횟수와 댓글 즉 타자의 관심을 통해 비로소 SNS 사용자는 SNS상에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성형외과와 피부과는 의대생들에게 워너비가 되었다. 인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상의 반증이다.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미를 창조하고 가꾸기보다는 사회가 예쁘다고 인정하는 모습으로 거듭나고자 성형과 피부시술에 혈안이 된 이들에게 인형이라는 호칭은 과하지 않다. 막이 오른 지 140년이나 지났지만 연극 <인형의 집>은 그래서 유효하다.

11월 15일부터 12월 29일까지 예술극장 통에서 겨울연극축제 ‘FAM 시리즈 2018’이 펼쳐졌다. 극단 청춘의 가족극 프로젝트, 초청공연인 통통 프로젝트, 직장인 극단 우연의 Non-pro 프로젝트로 구성된 ‘FAM 시리즈 2018’는 전반적으로 가족을 다뤘다. 통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젊은 배우 연합(광주연극배우협회)’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무대에 올렸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상연시간을 짊어지고, 감정의 과잉과 절제의 변주를 밀도 있게 연기해내야 하는 작품이기에 척박한 환경의 광주 연극인들의 <인형의 집> 공연은 귀하고 감사할 일이다.

<인형의 집>은 19세기에 만연했던 가부장주의, 남녀차별, 여성의 사회 진출 제한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시의적절한 작품이다. 지난 1월 29일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을 폭로하면서 한국판 미투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3월 6일 김지은 정무비서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상관이던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한국판 미투운동은 겉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었다. <인형의 집>은 연초에 시작된 미투운동을 연말에 되짚어 보게 해준다. 1897년 초연된 <인형의 집>이 불을 지핀 19세기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21세기의 미투운동이 가능했다.

여주인공 노라는 남편 헬메르에게 ‘종달새’ 혹은 ‘다람쥐’로 불리며 특정한 이미지로 규정지어질 것을 강요받는다. 여자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헬메르로 인해 좋아하는 디저트를 숨어서 먹는가 하면 크리스마스 무도회에서 헬메르를 돋보이게 하려 없는 돈에 몸을 치장하고 누더기가 된 마음을 다잡으며 춤을 연습한다. 누더기가 된 마음 역시 병든 헬메르를 살리려다 입게 된 상처 탓이다. 관객은 노라의 순종적인 모습과 헬메르의 권위적인 모습을 대할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유머란 당연함을 배반할 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인데, 노라와 헬메르의 모습이 이 시대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즉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인형의 집>의 배경인 19세기의 망령을 여전히 목격할 수 있다. 미디어는 헬메르를 대신해 미의 기준을 주입하고 있다. 자본은 각종 이벤트를 만들어 이벤트에 어울리는 차림을 소비하라 닦달한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착한 사람이란 손해 보는 사람이며 경쟁에서의 승리자만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았다. 우리는 노라가 사는 인형의 집보다 더 커다란 인형의 집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노라를 보며 지었던 쓴웃음은 결국 노라에게 비친 우리에게 보내진 것은 아닐까.

광주연극계의 열악함을 감안하더라도 <인형의 집>에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2시간 30분의 공연은 관객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형의 집>이 상연된 예술극장 통의 좌석은 작은 체구의 여성에게도 좁을 만큼 관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좌석이었다. 헬메르는 보수적이고 매사에 진지한 인물이다.

하지만 헬메르를 연기한 배우는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려 영단어를 남발했다. 클래식하게 헬메르를 표현하던, 캐릭터를 재창조하던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지점에서 헬메르를 연기한 점은 관객의 집중을 분산시켰다. 노라를 연기한 배우는 19세기라는 시대상을 반영한 나름의 어투를 구사했다. 하지만 다수의 사투리를 섞어 씀으로써 배우 스스로 노라의 감정선을 끊곤 했다. 관객에 대한 섬세한 배려와 캐릭터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은 기본이기에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다.

1636년 병자호란 시 50만의 조선인이 청나라로 납치되었는데 다수가 여성들이었다. 가까스로 풀려난 여성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고향사람들은 이들(환향녀還鄕女, 문란한 여성을 일컫는 화냥년의 어원이 환향녀다.)을 정절을 잃은 문란한 여성으로 취급했다. 심지어 사대부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여성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했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끊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후 일본은 증거 인멸을 위해 일본군 ‘위안부’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사살했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이들에게 고향 사람들은 등을 돌렸고, 집안 어른들은 가문의 수치라고 했다. 일본은 은폐하고 한국은 방관했기에 피해자들은 숨죽이고 숨어 지내야 살 수 있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자는 이러한 인간의 공통점을 인(·씨앗)이라 명명하며 “인간은 모두 같은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환향녀, 노라, ‘위안부’ 피해자, 서지현 검사 그리고 김지은 정무비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노라들이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함에 비춰볼 때 차별과 지배는 조셉 캠벨과 공자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성이란 말인가. 세상에는 억압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기에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여성억압을 인간 전체에 대한 문제가 아닌 강자에 대한 약자의 폭력이라 해석하고 싶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폭력으로 여성 억압을 바라볼 때 여성 억압을 허무는 동력 즉 동료가 생긴다. 세상에는 강자에게 억압당하는 수많은 약자들이 존재한다. 편의점에, 백화점 주차장에, 지하철 스크린 도어 공사장에, 전봇대에, 발전소에…… 생존을 위해 수많은 약자들이 기꺼이 인형되기를 감수하고 있다. 반대로 불합리에 저항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성적 취향을 존중받기 위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인형되기를 거부하는 약자들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약자들과 연대할 때에만 여성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쪽수 앞에서는 영원한 강자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라처럼 강자의 억압에 의해서만 인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깡은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다. 즉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내가 원하는 삶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인지 고민해볼 시간이 없었다. 학교와 사회 그리고 어른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애쓰다 보니 자진해서 인형이 되었고, 자신이 가진 욕망의 실체로의 접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인형의 집>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라는 “이제 나는 나와 사회에 대해서 알아볼 계획이에요.”라는 대사를 남기며 인형의 집을 떠난다. 강자의 억압에 의해서 건 욕망에 대한 착각에 의해서 건 인형이 된 누구라도 노라처럼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가길 염원한다.

글. 김태균 (광주아트가이트 편집위원)

sinbangjjang@hanmail.net


젊은 배우 연합(광주배우연극협회) ‘인형의 집’ ⓒ 사진제공 ‘극단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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