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3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3

50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독백.
떨어지는 순간에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떨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어떻게 착륙하느냐’이지.

오래된 프랑스 영화 「증오 <원제 : La Haine>」는 한 남자의 독백이 깔리는 중에 멀리 우주에서 동그랗고 푸른 지구를 향해 화염병이 던져지고, 폭발과 동시에 그것이 터지고 있는 파리의 한 시위 현장으로 시작됩니다. 젊은 시위대가 최루탄 가루가 자욱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화염병을 던지며 무장한 경찰들에게 격렬하게 맞서는 흑백 화면이 흐르는 동안 쿵작쿵작 흐르는 레게 음악은 밥 말리의 「버닝 앤 루틴 (Burnin’ and Lootin’)」. 1994년, 시라크정부가 통과시킨 ‘이민자 차별법’에 반발하여 파리의 근교 방뤼외 (Banlieue) 지역에서 벌어진 이민자들의 실제 시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당시 모두 20대였던 마티외 카소비츠 감독과 배우들의 실존적 에너지가 넘칩니다.

비디오를 빌려 온 남동생과 그 후배들 일당 사이에 무릎을 껴안고 앉아서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프랑스 이민자 2세 청년 세 명의 24시간을 멍하게 응시하던 기억이 납니다. 욕지거리, 총질, 마약, 시시껄렁한 농담, 불평, 걱정, 분노를 지루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들은 화병에 걸린 건달들 같았습니다. 당시에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동포들이 한국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는 했지만 이민자나 이주민의 문제가 아직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무수한 목숨을 앗아갔고, 또 격렬했던 우리의 민주화, 노동운동의 그것에 비교하면 그들 프랑스 이민자의 시위는 현실감 없고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팔짱을 끼고 봤지요.

오히려 때로는 겁먹은 듯, 때로는 그들의 친구인 듯, 그러나 줄곧 제3자인 관찰자로 구경하듯 따라다니던 카메라 앵글과 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흐르던 기묘한 긴장감, 동생들과 둘러앉아 영화를 보던 그 시간의 풍경이 더 선명한 느낌으로 남아있습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던 서울 신림동의 작은 자취방이 우리의 담배 연기로 너구리굴이 되는 동안 문 밖의 좁은 골목길을 울리던 동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며,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던 농담과 웃음소리도 들리는 듯한 그 풍경 속에서 우리도 모두 20대였습니다.

그때 저는 몰랐지만, 세계를 뒤흔들었던 이 영화 「증오」에는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 저변에서 흐르는 전 지구적 위기를 알리는 장치와 통찰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수자적 무의식의 사회적 배치와는 다른 개념으로 지역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내부와 외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문명을 내부와 외부의 개념으로 나누고, 지금의 문명을 ‘생명정치’라 정의했습니다. 문명의 내부라 함은 제1세계, 자국민, 다수자, 중앙, 도시 등이고, 외부는 제3세계, 이민자, 난민, 소수자, 광인, 지역, 생명, 자연 등입니다. 이 생명정치의 특징은 내부는 미디어, 교육, 스포츠, 여가생활 등 체제의 모든 영역에서 부드럽게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외부는 철저하게 혐오,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무엇 때문에 지금의 문명을 내부와 외부라는 개념으로 나누어서 진단했을까요? 그것은 내부와 외부의 개념이 지금의 자본주의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무상으로 외부를 착취하여 무한 성장을 이루며 내부를 키워온 자본주의 체제는 세계의 자본 시장이 통합되고 그 힘이 국가를 넘어선 현시점에서 이념, 국가, 민족, 인종, 그 어느 것보다도 앞서는 경계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어서 펠릭스 가타리는 지금의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문명의 외부는 이제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며, 외부는 모조리 내부의 통제 안으로 들어왔고 전 세계적으로 퍼진 비슷비슷하고 동질화된 문화와 삶, 사고의 패턴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안토니오 네그리 또한 외부는 사라졌다 판단하며 1세계 내에 내부 식민지인 3세계가 있고, 3세계 내부에 내부 제국 주의인 1세계가 있다는 ‘제국(Empire)’ 이론을 펼칩니다. 외부는 소멸되고 내부 만이 남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제국의 구도는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림동에 모여서 영화를 보던 우리는 서울에 살고 대학을 나왔으며 신체 건강한 자국민이라는 내부자이지만, 한편으로는 각자가 지방 출신에 ‘SKY’라 불리는 일류 대학 졸업생도 아니며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철학과 예술을 하는 가난한 20대의 소수자, 외부자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 더하기 1은 2라는 수학적 패러다임이 당연하고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 문명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우리는 모두 분명히 내부에 속한 존재입니다.

결국, 실제적인 외부는 없고 내부가 외부를 포섭하는 과정과 그 결과인 외부의 소멸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환경 파괴, 부의 양극화, 전쟁과 난민, 엄청난 수의 기아 사망자, 생명 경시 등,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를 마음껏 착취하여 경제성장을 이루던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이제 외부가 소멸된 지점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성장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내부로 눈을 돌려 그곳에 가상의 외부를 설정하여 성장을 이어 가기로 합니다. 외부의 조건을 가졌던 모든 것들은 다시 외부로 규정되어 착취의 대상이 되고, 또한 필요에 의한 새로운 가상의 외부는 차별과 배제라는 방법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네그리의 ‘제국’ 구도로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요를 꿈꾸며 함께 성장을 일구던 터전은 개발과 도시재개발사업의 대상이 되고, 지역은 중앙의 발전과 생존을 위한 식민지나 하위 단위로 전락하고, 젠트리피케이션, 비정규직과 하청업, 이주노동자, 곳곳에 들어서는 대형마트, 멀티플렉스 … 핵발전소 건설, 밀양 송전탑, 택배사업의 구조,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죽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재개발까지, 제국은 이미 우리 현실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역

이런 개념으로 바라보면 지역은 지리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시, 외부를 배경으로 내부와 외부를 다룬 영화, 「증오」를 돌아보겠습니다. 배경은 이민자와 서민들이 모여 사는 파리 근교의 지역을 통틀어서 일컫는 ‘방리외’ 지역,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흑인, 유대계, 아랍계 이민자 2세 청년들이며 학력도 직업도 돈도 애인도 미래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그런 청년들이 잔뜩 모여 있고 차별로 나뉜 내부와 외부 사이를 채운 것, ‘증오’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증오의 시작은 이곳이 아닙니다. 어디일까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밤에 방문했던 파리일까요? 무엇이 이 증오를 녹일 수 있을까요?

사회의 큰 구조 변화를 통한 문제 해결 가능성은 이미 그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눈을 돌려 가장 작은 단위인 우리 각자에게서 답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외부의 소멸이 만든 이 죽음에 이르는 내부의 강직증, 단조로운 가치체계, 삶의 틀에서 우리 또한 우리 안에서 외부성을 찾고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차별과 배제로 규정한 외부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다채로운 외부성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이지요. 바로 가타리가 문명의 사활이 걸렸다고 강조한 ‘특이성 생산’입니다. 우리가 외부성을 자식처럼 낳아서 사랑하고 돌보며 키우는 일은 우리 각자와 공동체, 사회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새롭게 배치할 것입니다. 제3의 장, 새로운 지역을 만드는 것이지요. 여기에 경계가 없고 자유로운 창조와 생산이라는 문화 예술의 특성이 역할을 합니다.

저에게 영화「증오」의 내용보다 그것을 보던 풍경과 느낌이 더 생생한 이유는 아마 그 작품이 만든 보이지 않는 새로운 지역, 그 시공간으로 제 안의 외부성을 호출하여 또 하나의 존재로 살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경찰과 주인공 한 명이 서로의 이마에 총을 쏘는 비극이지만, 총성이 아직 울리는 그곳에서 독백은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아직은 괜찮아!
중요한 건 추락이 아니라 착륙이니까!

글. 김신윤주 (공공·설치예술가)

shineshin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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