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2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2

지식인과 예술가는 다양한 공중이 편리하게 사용할 개념, 지각, 정서로 이루 어진 도구상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 펠릭스 가타리

몇 년 전 뉴욕에서 네티브 아메리칸 인디언의(Native American Indian) 축제에 갔던 기억납니다. 일 년에 한번 3일동안 열리는 축제인데, 오래된 극장 안에 모인 수많은 인디언들을 보며 저의 판에 박힌 앎과 현실의 간극에 정말 놀랐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흑인, 백인, 아시안, 남아메리칸 등과 피가 섞인 그들은 여러 인종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되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디언의 모습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전형적인 유럽계로 보이는 한 백인 가족은 조상 중에 아메리칸 인디언이 있으니 자신들도 인디언이라 정체성을 주장했고, 여러 부족들 중에서 그날의 축제를 이끈 추장님은 흑인이었습니다. 사진도 비디오도 촬영할 수 없는 그들만의 축제에 초대된 덕분에 각자가 몰아의 경지에서 추는 춤도 함께 추고, 남자들이 커다란 북을 함께 연주하는 공연도 보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장님이 어린 아이에게 이야기로 세상의 이치와 지혜를 알려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글이 없던 인디언들이 후손에게 구전하는 전통인데, 하늘과 땅과 나무, 새, 물고기, 바람, 꽃… 모든 자연들이 그 이야기 속에서 목소리를 가지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너져 가는 천정 높고 낡은 극장에 조용히 둘러 앉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큰 새의 날개 깃털을 머리에 둘러 꽂은 흰 머리 성성한 추장님은 한 어린 아이에게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대화를 하듯이 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저는 그 광경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습니다.

이야기

그 아름다운 구전의 전통에는 조상들의 지혜를 전달하는 역할 보다 더 깊은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지금 인류 문명의 위기를 ‘이야기 없음’이 초래했다고 진단합니다. 서사가 없는 시대의 몰락인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슈퍼에서 산 과자, 인터넷으로 주문한 바지, 어제 카페에서 주문을 받던 청년, 우리는 그것들, 그의 ‘이야기’를 모릅니다. 선물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요. 대량 생산되어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상품에 익숙한 나머지 사람마저 상품이 된 이 문명에는 분명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 바쁜 세상, 물건이나 사람과 나눈 짧은 관계에서 시간과 공간은 두께도 없이 산산이 조각난 파편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깊은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모락모락 발효시키면 이 문명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철저하게 문명의 외부로 규정되어 몰살 당했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1%라도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이면 백인이 아닌 것으로 차별하는 백인과 반대로 1%라도 섞이면 아니, 인류는 모두 형제라며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외부는 열린 문의 의미 였습니다. 문명의 위기라는 지금, 지역에서 예술 하기를 고민하며 그들의 지혜에 기대어 볼까 합니다.

떠오르는 주인공

잠시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1’에서 소개한 어셈블의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어셈블의 예술행위에 대한 규정과 목표도 중요하지만, 프로젝트의 여러가지 성공 요인 중에서 저는 특히 그 예술 환경, 생태에 주목합니다. 주민들의 도시재생의지가 주민토지신탁을 결성하여 프로젝트 그룹에 의뢰를 했고 기관은 이를 도왔습니다. 주민- 예술가- 기관이라는 삼박자 협치의 좋은 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는 그 지역 주민의 주도성, 주체성이 이룬 성공입니다. 원래적인 그 지역의 특성과 주민을 몰아내고 수익구조형 단지를 조성하곤 하는 현재 우리의 도시재생사업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부분은 지금 다룰 수 없지만, 리버풀 주민의 주도성과 주체성이 바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볼 지점입니다.

이 시대의 암울함에도, 높아지는 지적수준과 자성의 감성, 직접 소통하고 개인의 목소리를 발화케 하는 정보통신의 발달은 거대한 집단지성의 등장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촛불이 모여서 정권을 바꾼 혁명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다중은 그저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대상이 아닌 그 주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변화 무쌍한 예술의 특성이 다중에게 주체성을 불러일으키고 각자가 소수성, 외부성을 만들며 새로운 미래의 좌표를 설정하는 좋은 재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술 또한 그 안에서 생명력을 되찾고 있습니다. 이제 지역 예술에는 예술가와 함께 지역 주민이 예술을 뿌리내리게 하는 터전이자 주체로 중심에 섰습니다.

텃밭

지금의 시대,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제국의 경제적 구조와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생명정치의 시대는 경쟁과 속도에 휩쓸려서 무너진 공동체 의식과 작은 생명들에 대한 감수성을 돌아볼 틈을 주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의 생존권을 틀어쥔 기획되고 보여주기 식의 특화된 문화 예술 사업은 극소수의 예술가만이 살아남는 신자유주의 자본 시장의 구도 그대로 예술의 경쟁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번뜩이는 영감과 특이한 시각으로 무디고 단단한 사회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낯선 숨을 불어넣어 새로운 호흡을 일으키던 예술은 아사의 궁지에서 자진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이 획일화된 메트릭스의 시대에서 이제 지역은 인류 문명을 살리고 도리어 예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중요한 거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지역에서 예술하기의 현실적인 부분을 짚어 보겠습니다. 지역 예술은 지리적 한계와 부족한 인프라, 예산 등 때문에 주제와 소재가 빈약하다는 인상을 주곤 합니다. 여기에 기관이 주도하는 경쟁과 기획형 예술경영 시스템은 지역 예술의 다양성을 더욱 척박하게 합니다. 예술가의 활동 환경은 어떨까요? 지역만이 아닌 문제로, 각자도생하는 그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최악의 빈곤층일 것입니다. 지원되는 금액에서 단 10 원도, 물 한 모금도 예술가 자신을 위해서는 쓸 수 없는 지금의 예술지원 시스템은 말 그대로 보여지는 결과물만을 위한 지원이니까요. 생계는 고스란히 예술가 각자의 몫으로 돌려집니다. 예술 노동이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예술가 생존의 길은 매우 좁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자연스럽게 폐쇄적인 예술 환경으로 이어집니다. 외부성을 귀중한 특 성으로 하는 지역 예술에 내부성이 고착되는 현상은 사실상 지역 예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결국, 지역 예술은 예술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주민, 기관, 시스템 모두가 함께 시간을 들여서 돌보고 키워야 하는 일종의 공동 텃밭일 것입니다. 그 텃밭은 둘러 앉아 가꾸며 끊임없이 수확물을 나누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축제의 장입니다. 그렇다면 이 텃밭을 어떻게 일궈야 할까요?

 

우주에서 보물찾기

우리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인디언의 구전 전통에서 지역의 국지성이 지역예술의 보물창고 라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국지성은 깊고 숙성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바로 그 조건입니다. 서로를 깊이 없이 뻔하게 대하는 것은 상품 질서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사람들에게서 잠재성과 외부성을 발견해가며 이야기 구조를 재건해야 합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모두 함께 겪었던 구도청 앞 회화 나무가 죽었을 때 기적같이 나타나서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아들 나무, 죽어가던 회화 나무를 살리기 위해 무관심한 기관들을 찾아다니고 굿까지 했던 이제 머리카락 희끗한 5·18의 소년병, 수십 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골동품 가게의 녹차를 좋아하는 사장님, 광주극장 옆 골목 안에 자리 한 ‘소년의서’ 책방지기… 관계의 깊고 광대한 우주 안으로 외부성이라는 별들을 찾아 떠나가봅시다. 지역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이 그곳에 있습니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지 않는 지역들로 향하도록 안내하는 길이다. – 마르셀 뒤샹

글. 김신윤주 (공공·설치예술가)

shineshin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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