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실존은 모든 예술의 생명샘이자 발신 기지

작가의 실존은 모든 예술의 생명샘이자 발신 기지

지역 문화 분권의 일환으로, 지역문화진흥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지역 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문화국가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지역문화진흥법’이 시행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하지만 법 제정의 당위에 걸맞게 지역문화가 활성화 된 기미는 뚜렷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법 제정의 목적이 무엇인가? 지역 문화 분권의 일환으로, 지역문화진흥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지역 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문화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위에 걸맞게 지역문화가 활성화 되는 기미는 뚜렷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과연 이런 법이 발효됐나 싶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도 희미하다. ‘죽은 법’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국회의원 시절 ‘지역문화진흥법’의 발의자였던 도종환 장관이 취임하면서 비로소 법 운용이 제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던 문화예술계의 기대도 시들해지고 있다. 변화의 조짐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위원회는 여전히 중앙집권적 정책 기능을 고수하고 있으며, 예술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정부 산하기구답게 관료적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진흥법을 자신의 권리로 활용해야 할 지방정부도 잠을 자고 있다. 정부의 의지도 그렇지만, 조례제정 등을 통해 모법의 취지를 지역 단위에서 구현하려는 지자체의 의지도 박약하기 짝이 없다. SOC 예산을 유치하고 관련 국비의 배분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지, 주어진 재원을 지역문화진흥을 위해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언급하자면 무지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무지한 지역문화진흥정책 

문화예술 예산의 지역 분배의 관점에서 다소의 개선이 이뤄졌다는 분석을 인정한다면, 문제는 예술진흥 정책의 ‘철학 부재’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현재 대다수 지방정부에서 이뤄지는 문화예술진흥 시책은 절름발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보기에 앞서 현명한 농부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두는 게 좋을 듯 싶다. 

현명한 농부는 좋은 종자를 키우고 기름진 옥토를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농부는 농사철만 바쁜 게 아니다. 씨앗과 토양에 대한 관심이 없이 재배와 수확에만 집중하는 농사는 언젠가는 경쟁력을 상실하고 주저앉는다. 결국은 망하지 않기 위해 값비싼 돈을 들여 씨앗을 사와야 하거나 화학비료를 토양에 쏟는 단기처방으로 더욱 땅을 버리게 된다. 생산물도 제값을 못 받을 게 당연하다.

지방정부의 예술진흥 행정은 우매한 농부의 처신과 닮아 있다. 씨앗이랄 수 있는 기초예술에 대한 투자는 인색하고, 문예의 확장과 유통 또는 소비의 성과에만 매달리고 있다. 창의적 콘텐츠가 쌓여있지 않은 비루한 창고에서 피를 뽑아가듯이 추출해 나르는 일에만 혈안이 돼있다. 당연히 핵심이 부실하다보니 과대 포장과 겉멋내기로 성과를 가장한다. 결국은 문화예술진흥행정이 관광 활성화 행정으로 둔갑해 갈 길을 잃고 만다. 수십억의 예산을 쏟아 문화축제를 여는 동안 지역의 소극장들은 한명의 관객 앞에서 배고픈 연기를 해야 하고, 문예진흥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배분되는 보조금은 예술협회나 기관 및 사회단체에 집중되며, 기초예술 장르에 몸담은 작가들은 고작 몇백만원의 자린고비 지원을 받을 뿐이다. 

작가의 영혼과 맞닿아 있는 차별화된 공간들 

이러한 왜곡된 지역 환경 속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참담하고, 슬프고, 쓸쓸한 일이다. 예술행위의 고매함, 그리고 그 인문적 가치에 대한 신뢰가 실존의 핏속에 녹아있지 않다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지역에서 예술행위를 하는 아티스트들이 이 굴레를 벗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네트워크의 이너서클이 되기 위해 수도 서울이라는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 그리고 왜곡된 구조를 숙명인 양 받아들이며 초라한 창작행위를 겸하며 또 다른 생업의 비상구를 모색하는 길이다. 그것이 ‘인력 부재’와 ‘인프라 미비’라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 있는 지역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의 유일한 선택지여야 하는가.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순례길,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빈센트 반 고흐의 생 레미, 폴 고갱의 타히티가 작가의 영혼과 맞닿아 있었듯이…차별화된 공간에서의 작가의 실존은 모든 예술의 생명 샘이자 발신 기지임을 증거하고 있다. 작가의 거처는 문화 다양성의 발원지에 다름이 없으며 세계와의 소통 또한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문화예술적 관점에서 지역은 지류가 아닌 영원한 본류이며, 지역에서의 예술행위가 변방의 가치로 취급되는 세류는 반문화적이라 규정할 수밖에 없다. 

‘날 것의 소통’이야말로 문화공동체 진화의 힘 

오랜 세월을 거치며 후대에 거듭 증명된, 이 모든 문화사적 교훈을 곁에 두고도 중앙과 변방의 경계를 당연시한다면, 진화하는 문명의 오랜 홀대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극이라는 장르 예슬에 대한 담론이 하나의 비상구가 될는지도 모른다. 인류 문명의 태동과 함께 시작됐다는 기원설을 지닐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연극은 19세기 말 이래로 줄곧 소멸의 위기가 거론됐지만 지금도 우리들 곁에 살아남아 있다. 그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편견을 유발할만한 다른 어느 부대적인 장치나 배경 혹은 엔터테인먼트의 미끼도 없이, 오직 본능의 접목처럼 삶을 화두로 ‘날것의 소통’을 한다는 점일 것이다. 개개의 독자가 밀실에서 한페이지 한페이지의 책장을 넘기며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문학이라는 기초예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날것의 소통을 통한 삶에 대한 개개인 성찰의 집합은 곧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며, 우리는 곧잘 이를 ‘인문의 힘’이라 일컫기도 한다. ‘more culture, better society’가 문화예술진흥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면, 날것의 소통을 하는 위기의 장르들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야말로 문화진흥정책의 진정한 타깃이 돼야한다는 논리적 귀결점에 이를 수밖에 없다. 

소외의 길을 걷는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행위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 또한 위기의 장르들을 대하는 보다 진화된 정책의 지역적 구현을 향한 등가의 타깃이 돼야함은 물론이다.

지역 예술가들의 존재감 확장을 위해 

앞장에서 줄곧 강조했듯이, 예술가의 거처가 창작행위의 제약이 되선 안된다. 지역에 따라 예술장터의 크고 작음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작가의 작업이 그 장터의 크기에 따라 규정될 수는 없다. 장터는 그저 장터일 뿐, 장터가 예술가의 창작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선 중앙정부의 혁신적인 시각 변화도 필요하지만, 지역의 공세적 대응책이 강구돼야 할 때다. 그 첫걸음은 지역문화진흥법 시행이라는 동기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우선 모법의 취지를 실천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자치법규 제정이 시급하다. 법규 마련은 국비 확보 및 차별화된 예술가 지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정부가 주도하는 방식의 법규 제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자체 주도 하에 제정된 법규는 중앙 정부 예술위원회의 축소판 역할을 함으로써 또 하나의 구태의연한 관료적 구조로 자리잡게 될 가능성이 짙다.

지방의 예술가와 풀뿌리 자치의회가 협력하는 형태의 법규 제정 추진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지방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의 존재감을 확장시키기 위해선 예술가 그룹이 스스로 함께 연대하여 자신들의 존재감과 활동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내용을 담은 지역문화진흥법 제정 취지의 참된 실천을 위한 자치법규 제정 및 제도 확산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글. 박호재 (소설가, 전 광주문화재단 정책실장) 

pj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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