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1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1

2015년 말, 미술계 최고의 이슈는 아마도 유럽 최고의 명망을 가진 터너 상(Turner Prize)이 공공예술 프로젝트 팀 ‘어셈블Assemble’ 그룹에게 주어진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건축가와 디자이너, 역사 등을 전공한 18명의 젊은 프리랜서 작가들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자유롭게 토론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예술, 건축, 디자인, 특히 지역사회와 연결된 도시재생프로젝트를 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항구도시 리버풀의 ‘그랜비 스트릿’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활기찬 거리였지만, 대량 실업과 지속되는 가난으로 국가가 그 지역의 주택을 매수하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남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을 지키며 도시를 재생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왔고, 주민토지신탁을 결성하여 어셈블에게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의뢰했습니다. 이 리버풀의 노후된 공공 주택단지를 개조하는 ‘그랜비 포 스트리츠 프로젝트 (Grandy Four Streets Project)’가 어셈블에게 터너 상을 안겨준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장을 접목하여 도시에 변화를 만드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바로 그 지역의 주민’이라는 어셈블의 신조는 단순한 공간 리모델링이 아닌 ‘주민들의 창의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도시’로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들은 지역주민들이 토론과 작업에 참가자와 협업자로 참여하도록 적극 유도했습니다. 또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워크샵을 열고 작업장에 고용하여 훈련을 시켜서 공사 잔해와 폐건축자재로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창의적이고 자립적인 생산력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들은 공예품들을 SNS와 마켓 등, 온. 오프라인에서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하도록 파트너쉽으로 함께 모든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한 쇠락해가던 도시에 외적인 변화와 내적 수익구조를 만들어준 이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공공예술, 정확히는 ‘새로운 쟝르의 공공예술 New Genre of Public Art’라는 쟝르로, 데미안 허스트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에게 돌아가던 터너 상을 수상하여 예술을 규정하는 시각의 변화를 가늠케 합니다. 왜냐하면 어셈블 자신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들 그 누구도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예술도 그렇게 반응해야 하고 우리도 계속 변화해야 한다.”
루이스 슐츠, (‘어셈블’의 멤버)

신자유주의가 지구라는 혹성 한 상을 거의 다 포식한 지금의 최고 유행어는 아무래도 ‘재생’인 듯합니다. 재생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남

2. 타락하거나 희망이 없어졌던 사람이 다시 올바른 길을 찾아 살아감

3. 낡거나 못 쓰게 된 물건을 가공하여 다시 쓰게 함.

그런데 동사인 ‘재생하다’의 사전적 의미 세번째쯤 되는 곳에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재생하다: (생물) 상실되거나 손상된 생물체의 한 부분에 새로운 조직이 생겨 다시 자라나다.

아무래도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서 어셈블이 창작하려는 예술적 결과물은 ‘재생하다’인 것 같습니다. 예술 작업을 통해서 계발되어 자연스레 도시를 바꾸고 지속적으로 발생되길 기대하는 ‘주민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변화는 하나의 소재이고 과정이겠지요. 저는 생물에게만 사용되는 ‘재생하다’의 의미와 그것이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라는 부분에 주목합니다. 결국 도시재생이란 새로움으로 재탄생하는 도시의 생명운동일 것입니다. 이 생명운동이 탄력성과 회복성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산하는 생태계를 재조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재생’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 혹은 빈사상태가 어떻게 유발되었고 전 세계를 관통하는 첨예한 이슈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다수자적 무의식

도시 리버풀이라는 지역의 쇠락은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겨가 그곳의 인구는 터질 듯이 불어났고 경제, 문화, 예술도 집중, 수렴되었습니다. 이런 중앙집중현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것일까요?

저는 이 현상을 다수자적 무의식의 욕망이 만든 사회적 배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수자는 한 사회의 주류이자 권력을 가진 집단이고, 다수자적 무의식은 한 개인의 무의식 안에 있는 다수자성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지향성이기도 한 본인의 준거 기준입니다. 현대인의 다수자적 무의식은 성장주의, 승리주의, 보여지는 것, 경쟁과 기회, 효율성, 속도를 중시하는 문화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국 분리, 차별, 배제, 증오 등으로 드러나기에 다수자 무리 내부에서 외부로 튕겨지지 않으려는 공포심이 늘 그 저변에서 작동하지요.

우리 평범한 사람들 안에서 그것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요? 저는 미국에 있는 동안 동양인 이민자들 중에서 본인이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백인에 속한 듯이 행동하고 흑인과 남미사람을 차별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준거 기준을 다수자에 둔 무의식의 표현입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배제를 지지하거나 묵인, 외면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아파트 가격의 하락을 이유로 장애인 시설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집단 이기심이라 칭하지만 사실상 그것을 묵과하는 사회의 저변에는 완강한 다수자적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의 다수자적 무의식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여 여성과 소수자, 사회적 약자, 지역, 학벌, 인종, 동물과 자연까지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차별과 배제, 혐오, 증오로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늘 섬세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중요할까요? 우리의 다수자적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다수자에서 소수자로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지금의 자본주의 형태를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로,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으로 명명하며 그것이 다양한 매체와 방법을 통하여 세상을 통제한다고 주장합니다. 아파트, 자동차, 대형 마트, 멀티플렉스, 여가생활, 어쩌면 꿈까지 동질화 되고 있는 전 세계적 삶과 문화가 증거입니다.

우리의 다수자적 무의식은 텔레비젼과 미디어 등 여러 매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송출되는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제국에 의해서 조절되고 통제되며 동시에 그 일부분이 되어 함께 욕망을 재디자인하고 생물화 합니다. 그리하여 성장주의과 승리주의가 불러일으키는 경쟁, 특히 시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효율성과 기회, 성공의 화려한 유혹이 익명성 안에서 무한 경쟁에 좋은 공간을 창출하여 열심히 키워온 것입니다.

중앙집중현상은 결국 이 다수자적 무의식의 욕망이 만든 사회적 배치이고, 서울은 그것이 만든 실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울이 도시의 기능인, 경우의 수가 많고 회복성과 탄력성이 특징인 생태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지역의 청년들에게 더 이상 기회의 경우 수가 돌아가지 못합니다. 비슷한 삶과 문화, 오락 코드 안에서 주민들의 삶은 단조롭고 납작하게 굳어가는 듯합니다. 이 반복되는 동질의 삶은 하나의 틀에서 나온 젤리나 푸딩처럼 물질성과 냄새마저 느껴집니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중앙집중현상의 결정체인 서울을 다수자적 무의식의 사회적 배치라는 면에서 접근해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지역의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할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제국이 유혹하는 삶의 환상을 구별하는 눈을 뜸과 동시에 다수자적 무의식이 향하던 곳, 중앙으로 수렴되어 높게 치솟던 곳으로부터 눈길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자리에서 접근을 시작해야합니다. 그곳은 성장주의가 아닌 지속 가능한 발전주의로, 성공을 위한 관계가 아닌 관계 속에서의 성숙으로, 효율성을 위한 속도가 아닌 깊이를 만드는 느림으로, 경쟁이 아닌 환대와 돌봄이 만드는 사랑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으로 가는 자리입니다. 우리 존재의 준거지를 다수자적 무의식이 아니라 소수자적 그것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노력이 벌어지는, 무수한 소수자가 탄생하는 독립적인 주체성의 배태지입니다.

통합된 다수자적 권력지향 경쟁 구도가 아닌 독립된 소수자적 협동과 연대, 돌봄의 구도는 전혀 다른 평화와 평등의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고, 바로 이런 각자의 존재적 변화가 핵발전소, 고압 송전탑, 쓰레기 폐기장 등으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서울을 위한 지역이라는 지금의 구도를 해결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이는 서울과 지역이라는 지도적 구도만이 아니라, 서울과 지역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앙과 주변의 구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이성 꽃 피우기 – 지역에서의 문화 예술

많은 학자들이 지금의 인류가 처한 존립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지역’을 주장합니다. 지역의 문제를 재생의 차원에서 바라보며, 저는 잠시 어셈블의 공공예술프로젝트로 돌아가 재생과 문화예술의 관계를 다시 짚어보겠습니다.

어셈블 그룹은 도시의 주민들과 함께 재생의 생태를 조성하고 그것이 지속되도록 돕는 작업을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형태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살펴보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20년이 넘도록 사투를 벌이고 주민토지신탁을 결성해서 어셈블이라는 전문가 그룹을 고용한 리버풀 주민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 주체적인 주민과 어셈블 그룹은 함께 아름답고 실용적인 공공의 공간을 만들고 주택을 개조하고, 그 과정에서 나온 폐건축자재를 재활용한 ‘재생’ 의미의 공예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라인까지 구축했습니다. 어셈블 그룹은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주민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계발하도록 돕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기술을 교육했으며 이를 통한 경제적 이득이 지속 가능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이 도시 주민의 주체성이 결국 자신들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창조했고, 그 과정과 결과가 재생의 생태를 조성한 것입니다. 예술의 특성은 그 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했지요. 우리는 이 도시가 재생된 과정을 지역의 그것으로 옮겨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타리는 ‘특이성 생산’을 문명의 사활을 건 과제라고 주장합니다. 특이성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문성과는 다릅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다른 것이 되어가며 소통하는 특이성은 상황 속에서 돌연 발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마을에 잔치가 열리면 정육점 사장님이 갑자기 사회를 보시고, 뒷집 아저씨는 이리저리 방석을 놓으며 자리 안내를 하고, 부족한 음식들이 이집 저 집에서 도착하고, 얌전하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노래를 한 곡조 뽑습니다.

또한 우리는 1980년 광주의 5.18 민중항쟁 과정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모습에서 특이성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여성이 메가폰을 잡고 방송을 하고, 분수대 위에서는 자유 연설이 이어졌고, 주먹밥은 약속 없이 만들어져 처음 보는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해방된 공동체의 자율적인 특이성은 유니버스를 흔드는 생명의 파동이 되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시공간을 넘어가며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이성이란 결국 다수자적 무의식이 만든 지배적이고 통합된 주체성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만의 소수자적이고 독립적인 준거 방식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주체성을 드러내며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저는 문화 예술의 고유한 특성이 지역의 주체성을 탐구하고, 생산하며, 지배적인 모델로 통합되지 않도록 집단적으로 보존하는 ‘특이성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재생’의 역할을 훌륭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이성 생산은 실질적인 재생을 이룹니다. 지역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지역전통의 예를 들면,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의 자유로운 표현을 매개로 창조적으로 재맥락화 하는 특이성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술이 한 지역의 특이성 재창조를 돕는 것도 그 자체가 무언가를 창작하는 예술행위이겠지요. 어셈블 그룹의 예처럼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새로운 접근이 그 예가 됩니다.

관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 되어감

마지막으로 저는 특이성이 ‘되어감’Becoming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착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관계가 만드는 존재의 되어감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흔히 아이를 낳고 아빠 엄마가 되어감과 그 과정에서 경험한 새로운 사랑의 경이를 예로 듭니다. 아이라는 존재가 부모를 새롭게 했을까요? 아니면 부모가 새롭게 변해서 아이를 사랑한 걸까요? 아이와 부모라는 존재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사랑은 태어났고 그를 통해 부모 되어감을 경험합니다. ‘되어감’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차원의 너머에 있습니다.

성공의 이미지가 온갖 처세술과 영웅 만들기로 난리 분칠을 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중에도, 서로를 위하여 색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되어감’은 우리 존재의 근본을 변함없이 얼싸안아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활동이 만듭니다.

인류를 압살하려는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제국, 차별과 배제, 혐오와 증오를 녹이는 길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어가며 다양한 특이성의 꽃을 피워 정원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은 꽃 자체일 뿐만 아니라 햇빛이 되고 물이 되며 정원사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원은 가꾸는 시간은 역동적인 자유로움으로 존재의 보이지 않는 본향을 찾아 떠나는 우리의 귀향길이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느껴보세요.
발바닥에 닿는 땅의 보드라움과 온몸의 세포를 흔드는 따스한 바람을.

글. 김신윤주 (공공·설치예술가)

shineshin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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