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은 소멸했는가

반딧불은 소멸했는가

 

비평가의 권위에 대하여

비평의 힘이 사라진지 오래이고 비평가의 권위란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비평이 전무한 시절이다. 과거 비평가들의 권위를 뒷받침해주었던 것은 현실적인 등단의 통로가 무척 좁았기 때문이다. 매년 1월 초 혹시 내 이름이 있을까 남몰래 신문을 사서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자 명단을 빠르게 훑던 문학청년들의 이야기는 이젠 소설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먼 옛날 이야기가 되버렸다.

또, 90년대 중후반 거의 모든 예술장르들의 개방과 자유화의 파고 속에서 백가쟁명을 겨루던 쟁쟁한 계간지와 월간지, 무가지 잡지들에서 벌어지던 무수한 담론들도 지나친 외국 선진이론의 나열식 뽐내기, 지금의 현실과 유리된 채 자기들만의 지적 나르시즘에 도취된 독백들로 비평을 대중과 창작자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거기에 최근의 SNS와 유튜브 등 수백수천의 1인 미디어의 등장은 비평의 권위는 물론이거니와 비평의 언어를 저급한 속물 취향에 대한 그렇고 그런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며 엔터테이너화 되어가는 경향까지도 보이고 있다. 여기엔 번뜩이는 언어감각을 지닌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유명인들의 짧은 글들이 비평의 영향력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사방에 비평이 존재하고 누구나 비평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진입한, 그래서 마치 문화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파시즘의 써치라이트앞에서 모두가 벌거벗겨져 버린 채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모욕하거나 그저 예 참 잘했어요 고생했어요 라며 서로를 무관심에 빠트리고 있는 저들의 전략이라는 생각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그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루카치, 『소설의 이론』(1916년) –

비평의 부재가 불러온 폐해들

그렇다고 비평이 고급예술이라 불리우는 것들의 호위대를 자처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무식한(?) 대중들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전위대가 되어야 된다는 쌍팔년도의 용감한 꼰대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대중, 민중, 시민 무엇으로 불리우든 그들은 늘 우리를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잊지 말자.

거의 전국적인 전 세계적인 비평의 종말 시대에 지역의 상황은 눈을 뜨고 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특히 모든 지역이 서울특별시의 식민지에 불과한 남한에서 지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 예술가들은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해방군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비평이란 것은 해방군에 돌을 던져야 하는 막대한 용기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되는 것이다. 누가 이 길을 가려고 할 것인가? 누구에게 이 가시밭길을 가라고 종용하겠는가? 자칫 내부 배신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는 이 길을 말이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중앙부처의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지자체의 공무원들, 그리고 확보한 예산에 따라 지원을 받는 예술가들, 예술가들의 활동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는 시민들, 다시 돌고 돌아 시민들 중에는 인쇄업자 식당 무대 조명 음향 화구상 악기상들이 얽히고 얽혀 있는 것이다. 홍성담의 <세월오월> 걸개그림 검열사건이 낱낱이 까발린 중앙정부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는 지자체의 현실에 마냥 예술지상주의 잣대만을 들이댈 수 는 없는 것이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예술은 결국 예술의 죽음 이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으로 드러난 예술이란 두루뭉실한 포장으로 감추고 있던 정치적 검열에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사실 홍성담의 <세월오월>의 문제는 예술지원제도의 가장 큰 문제인 비평의 부재가 얼마나 큰 해악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중앙의 문화예술위원회로 집중된 예산과 탑다운 방식의 사업은 결국 문화체육부 장관과 대통령의 정책방향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복되는 심사위원의 구성, 지원기관의 생리와 입맛에 맞는 사업계획서, 계량화된 수치로 지원사업의 실적만을 판단하는 각종 평가제도들(공공기관에 대한 경영평가 등), 공정성과 투명성 이라는 이유로 문서의 기계적 잣대와 해석에 갇혀버린 기관들, 타 지자체의 성공사례를 예술가들의 힘든 자기고뇌의 결과물을 무리하게 이식하기를 종용하는 무뇌아 수준의 공무원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중간매개자들을 공정성과 객관적 근거라는 이유로 행정문서의 타자병으로 격하시키는 행정우선주의, 그래서 남은 것은 정산을 잘 해주고 높으신 분들 행차에 들러리 잘 서주는 착한 예술가들이 남았고, 오로지 행정 절차만을 기계적으로 들이밀며 갑질을 하는 무뇌아 수준의 문화관련 공무원들이 남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회색 눈사람처럼 인생이 녹아내리는 헛 똑똑의 중간 매개자들이 남았고, 그리고 자기의 언어와 몸짓을 잃어버린 채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만을 찬양하는 파시즘의 전당에 두 손 높이 경배를 올리는 우리들이 남았다. 페이퍼 컴퍼니에 빗대 페이퍼 공화국의 페이퍼 예술가들만이 득의양양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는 중앙과 가까운 사람
항상 그는
그것을 <중앙>에 보고하겠소
그것을 <중앙>이 주시하고 있소
그것은 <중앙>이 금지했소
그것은 <중앙>이 좋아하지 않소
그것은 <중앙>과 노선이 다르오
라고 말한다

<중앙>이 어딘가?
<중앙>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중앙>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는 이 자의 정체는 또 무언가?
<중앙>을 들먹이는 그 때문에
자꾸 <중앙>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먼 곳에
<중앙>은 있다고
명령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온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번 근무가 잘 끝나면
나도 <중앙>으로 간다고
그는 꿈꾼다

그러나 십년 세월이 가도
<중앙>은 그를 부르지 않는다
백년 세월이 그냥 흘러도
<중앙>은 그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중앙>은 왜 그를 부르지 않는가?
<중앙>은 왜 그를 기억하지 않는가?

– <중앙>과 나 (중앙을 흠모하는 타자들), 장정일 –

 

그럼에도 비평의 중요성

우리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주고 우리 삶의 모순을 고발하고 우리 삶의 상처를 위해 연대하는 지역의 예술가 해방군을 위해 물을 기르고 주먹밥을 만들고 땀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물론 여기엔 진득한 관찰과 엄중한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때 남미의 게릴라들이 고립되며 마약상으로 전락해버렸듯이 지역에 갇혀 지역의 토호세력으로 변질되는 해방군들을 막아서야 된다. 지역의 특이성이라는 이권과 아집에 발목 잡히지 말자는 것이다. 자꾸 그것을 일깨워주자는 것이다. 지역의 특이성은 보편성을 획득해야 하고 외부의 보편성은 지역의 특이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지금 비평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비평의 독립성 보장이 비평의 제일 임무이자 제일 목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다. 그렇다고 비평의 고립이나 안하무인의 자위행위로 끝나지 않아야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나약해질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지역의 관계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것이다. 내가 모르더라도 같이 공부하자고 할 수 있다. 내가 용기가 없더라도 용기내라고 격려를 해 줄 수 있다. 내가 하지 않더라도 내가 배운 지식은 공유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애정이 없는 나눔이 적선에 불과하듯. 존중이 없는 비평은 나 잘났다는 위선에 불과하듯.

그래도 빛나는 써치라이트 앞에서도 자신만의 작은 불빛을 지키고 있는 반딧불들의 신호를 포착해야 한다. 그들이 보내는 신호가 예술이라면 그 신호를 기록하는 임무는 비평가들의 몫이다. 언제 어느 시대에도 평범한 소시민들의 잠재되고 억눌린 역량을 일깨우는 것은 시스템밖에서 서성거리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맴도는 서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그들을 예술가라 불렀고 예술가들의 뒤엔 항상 비평가들이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될 것이다.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바타이유)”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저 말은 우리의 구식 언어로는 새로운 사랑에 빠질 수도 그것을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은 반딧불 -민중이다. 그들은 밤으로 후퇴하며, 가능한 만큼 그들의 운동의 자유를 추구하며, ‘왕국’의 서치라이트에서도 도주하며, 불가능한 것을 감행하며,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긍정하며, 그들의 고유한 미광을 발산하며, 그 미광을 다른 이들에게 보낸다”라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1의 긍정에 동의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비관주의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지들은 왕국의 영광과 강경한 광선에 맞서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반딧불은 소멸했는가? 물론 아니다. 어떤 반딧불들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어둠 속에서 우리 곁을 스치듯 지나간다. 다른 반딧불들은 지평선 저편으로 떠났고, 다른 곳에서 그들의 공동체, 그들의 소수성, 그들의 공유된 욕망을 다시금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소수가 된 예술가들과 인민의 몸짓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글. 한재섭 (미술사)

badland69@hanmail.net


1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 『반딧불의 잔존 』, 2009 라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긍정에 동의하고 싶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