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파, 거리로 나온 예술가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60×167, 1884-88

ⓒ 일리야 레핀

이동파, 거리로 나온 예술가들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족적 특색을 신장시키며, 감상자를 늘리고, 창을 열어 신선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첫째, 지방에 있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예술을 소개한다
둘째, 러시아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애정을 발전시킨다.
셋째,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위한 시장을 찾기 쉽게 만든다.

-러시아 이동파의 슬로건-

예술은 사회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사회적 현상에 자신의 삶과 사상, 예술적 신념을 작품으로 반영하여 그 시대의 산증인으로 남긴다. 여기, 소수 권력자를 위한 미술을 거부하고 민중 속으로 발길을 향한 19세기 러시아의 화가들이 있다. ‘예술의 자유, 민족예술의 확립, 민중과 밀접한 예술’을 추구했던 ‘이동파’ 화가들은 신지식인들의 사상과 손을 잡고 다양한 주제로 민중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왜 스스로를 ‘이동전람협회, 이동파’라고 칭했을까? 그 명칭에는 당시 소수 권력층만이 자신들의 취향대로 누리던 예술을 민중의 삶을 담아서 민중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러시아 전역을 이동하며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한 그들 예술의 대상과 목적, 과정, 방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실한 애정이 모두 담겨 있다. 러시아 이동파는 러시아 곳곳을 돌며 1871년부터 1923년까지 모두 48회의 이동전을 개최하였다.

탄생

“그림은 황제와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

1800년대 러시아 왕정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1861년에 농노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절대군주 체제의 강화 속에서 모든 토지가 지주의 소유가 되는 부당한 토지 보상제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은 당시 인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해방 농노를 극빈한 소작농과 노동자라는 비참한 삶으로 내몰았다. 이에 진보적인 사상의 지식인층(Intelligentsia)과 문학, 예술가들은 현실을 반영한 비판적인 리얼리즘을 발전시키며 문화 계몽운동으로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직접 뛰어든다. 이 부분이 당시 유럽의 리얼리즘과 다른 러시아 리얼리즘만의 특징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위해 사회 변혁에 앞장선 이 지식인들과 문학, 예술가들의 긴밀한 관계는 그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동파’는 이 문화 계몽운동의 미술 운동으로, 소수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살롱 회화의 비현실적인 고전주의적 미술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민중과 현실의 삶을 담은 그림으로 러시아 미술사에 새로운 포문을 열었다. 당시에 미술 전시는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림은 황제와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한 ‘이동파’는 민중과 현실의 삶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민중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추위 속에서도 그림을 싣고, 보름 넘게 여행하며 러시아 지방 곳곳으로 순회 전시했다. 풍속화, 역사화, 혁명화, 초상화 등으로 표현된 이들의 그림은 그 회화적 완성도 또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미술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개혁 이후 전문적인 미술 교육 기관인 황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기틀을 만들었다. 유럽 회화에서 영향을 받아 고전주의 화풍이 주를 이루던 러시아 미술은 19세기 들어서면서 사회적 변화와 함께 점차 인간의 심리 세계와 감정에 대한 표현에 중심을 둔 낭만주의로 변화되고, 이는 다시 지식인층의 영향을 받아서 민중의 도덕심, 애국심을 고취하는 작품으로 사회 교육의 한 축을 이룬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는 점차 사회 비판적인 리얼리즘으로 발전한다.

1863년, 황실 아카데미 학생 중 14명이 졸업 전시회의 주제인 스칸디나비아의 신화 ‘바할라의 만찬’ 작품 제작에 반발하여 자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정부 당국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아카데미 졸업 예정의 학생들에게 기득권층의 권위를 고양할 내용의 그림 제작을 강요했다. ‘크람스코이’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수차례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학교를 자퇴하였다. ‘14인의 반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황실 아카데미의 우수한 졸업생으로 선정되면, 당대 예술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으로 몇 년간 국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던 특혜와 황실 아카데미 출신이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삶과 명예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이 학생들이 바로 몇 년 후 ‘이동파’를 창립하고 이끈 주인공, ‘크람스코이, 베니그, 드미트리에프, 오렌버스키, 리토첸코, 코르쥰킨, 슈스토프, 모로조프, 마코브스키, 쥬라레프, 레모크, 그리고레프, 페스코프, 페트로프’이다. 이들은 미아소예도프가 구상하여 같은 뜻을 가진 예술가들과 함께 조합을 결성했고, 1871년에 첫 ‘이동파’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에 1974년 전시회에 훗날 러시아의 국민적 스타 화가가 되는 ‘일리야 레핀’과 ‘바실리 수리코프’가 참가하면서 ‘이동파’는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동파 회화의 가장 큰 변화는 시선의 변화이다. 회화의 양식적인 변화도 있지만, 대상을 파악하는 시선 그 자체가 달라졌는데, 치밀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회화로 미적 가치를 획득하고 민중의 삶과 감성 모두를 아우르는 민중 성향을 갖추면서 이동파의 회화는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로 자리 잡았다. 크람스코이의 정신적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일리야 레핀은 예술에 있어 이상과 내용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는 크람스코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간의 생활이라는 드라마, 자연의 생명, 역사 정신 그 자체가 우리의 주제이며… 색채는 도구로써 우리들의 사상을 표현해야만 합니다.”라고 썼다.

일리야 레핀

이동파의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일리야 레핀, 바실리 수리코프, 바실리 페로프, 크람스코이, 시쉬킨, 마코브스키, 레비탄 등을 대표 작가로 들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와도 깊이 교류했던 레핀은 문학적인 소재를 한 화면에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 위에 사회문제를 투영시키면서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대표적인 역사화 중에는 <1698년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지 일 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들이 모두 고문당하고 있을 때 (1879년 작)>, 그리고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사회적 파장을 가져온 <1581년 11월 16일 이반대제와 그의 아들 이반, 199x254cm, (1885년 작)>등이 있고, 혁명적인 주제의 대표작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60X167cm, (1884-1888년 작)>가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유배를 갔던 혁명가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는 온 가족들의 심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1884년 12회 ‘이동전시회’에 출품되어 대대적인 호평을 받았다. 저명한 예술평론가 스타 소프는 이 작품에 대해 “진정한 당대 예술”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당시에 아버지나 남편이 유배 생활을 했거나 심지어 교수형을 당한 많은 사람이 그 작품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레핀에게 감사와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879년 10월에 지하신문 ‘민중의 의지’에 시인 민스키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바친 시, ‘마지막 고해성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사형수 (1879-1885년 작)>가 있는데, 레핀은 이 작품을 민스키에게 선물하였다. 수많은 초상화 중에는 친분이 깊던 톨스토이, 알코올 중독으로 위독해진 국민 음악가 무소르니스키를 찾아가서 3일 만에 완성한 초상화,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스타소프, 사업가 파벨 트레챠코프 등을 그린 작품이 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풍속화 하나를 소개하며 이동파의 진실성과 회화적 깊이의 위상을 짐작해보자.

이 풍속화는 레핀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이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29세에 완성된 작품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볼가강을 산책하다가 배를 끄는 인부들의 비인간적인 노동 현장에 충격을 받고 작품을 구상하였다. 그는 작품의 사실성과 완전한 표현을 위하여 3년여 동안 화구를 들고 볼가강으로 가서 배 끄는 인부들과 깊이 친분을 나누고 그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으며 그들의 삶과 작품의 일치를 고뇌했다. 힘겨운 노동의 비참한 현실과 인부들의 얼굴에 나타난 다양한 삶의 흔적들은 레핀의 예술혼에서 포도주가 발효하듯이 익고 익어 드디어 대작으로 탄생하였다.

인물들은 세 그룹으로 (4명, 3명, 3명) 묶여 화면에 가로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 구도는 그림의 서사성과 기념비적인 화면을 강조한다. 인물들 중에 맨 앞의 머리에 수건을 두른 사람은 카닌이라는 사람으로 성직자인 신부였는데 교직(敎職)에서 파면된 후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레핀은 여러 모습의 카닌을 스케치하고 그의 얼굴에서 지혜롭고 강인한 민중적인 현자의 모습을 읽어내고 그런 담금질을 견디어 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적인 견고함을 표현하였다. 카닌과 함께 맨 앞의 서 있는 우람한 체격의 사람은 다시는 농업에 종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농민이다. 앞의 네 사람을 한 부분으로 한다면 뒷부분은 라리카라고 하는 소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라리카는 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자세로 힘겹게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어깨에 매달린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 한다. 그의 서툰 자세는 배 끄는 일을 이제 막 시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소년의 오른쪽은 폐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그는 옷소매를 들어 땀을 닦으면서 쓰러질 듯 겨우 힘을 내고 있다.

1870년부터 레핀의 스케치들을 보아 왔던 비평가 스타소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작가는 성숙해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러시아 미술이 창조해 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을 가지고 나타났다. 레핀은 고골리에 비견될 만한 리얼리스트이고, 거의 고골리만큼 심오한 러시아의 민족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라고 평했다. 1873년에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이 완성되자 곧 비엔나국제박람회에 전시되었다. 배가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하는 거대한 사회구조를 상징한다면, 배를 끄는 노동자들은 사회 모순에 신음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Ivanovich Surikov, 1848-1916)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의 역사화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근위병 처형의 아침 또는 총기병 처형의 아침 (1881년 작)>이라는 작품은 붉은 광장에서 일어난 역사의 한 장면을 다룬다. 즉, 표트르 대제의 군 개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에 대한 황제의 단호한 대처를 다룬 작품이다. 당대의 민중이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며, 1881년 이동전시회에 출품되었다. 화가는 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신중히 접근하며 비록 역사에서 패배로 기억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간은 민중이어야 하기에 가장 근본적인 민중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불굴의 저항 정신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잔혹한 처형이나 총기병들의 패배가 아니라 역사를 이끈 사람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어간 인간들이 벌이는 팽팽한 긴장의 순간에 작품의 포인트를 두었다.

또한 <귀족 부인 모로조바 (1887년 작)>에서는 러시아의 종교 분열 시 구교도 편에 섰던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구교도의 신앙이 상인, 장인 등 민중의 마음을 사고 그들의 저항 정신과 만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포착하였다. 이 외에도 너무도 훌륭한 이동파 화가들과 작품이 많은데 소개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지만 이동파와 떼어놓을 수 없이 꼭 언급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와 트레챠코프 형제이다.

는 생활이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y, 1828-1889)는 이동파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교류했던 사상가로서 당대 지식인의 순교자적 삶을 보여주었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미학 이론은 ‘도대체 미()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인문적이면서 실용적인 태도에서 출발하였다. 인간 개별 존재는 결국 군집, 즉 사회를 이룬다. 이 사회는 미적 토대이긴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개인 모두 자율 의지를 갖추고 있다. 개별적 아름다운 것이 가진 어떠한 성질과 아름다움의 보편적 특징은 삶으로부터 그 인식이 가능하다. 인간에게 생명과 삶이 없다면 미는 무의미하다. 따라서 체르니셰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명제를 제시했다.

는 생활이다. 즉, 미()는 자연 가운데 추()를 간직한 것을 제외한 감각하는 것들에 대한 필요조건이며, 예술의 이름이 가장 가치 있는 경우는 우리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자연미를 감지하게 만들 때이다. 예술이 가진 미적 가치는 인간이 경험의 없다면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생활 속에서 일반적으로 흥미가 있는 것- 이것이 예술의 내용이다”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생활 미학은 이동파에게 하나의 미술사조를 일으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시대의 후원자 트레챠코프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예술 뒤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후원이 있다. 1923년 혁명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될 때까지 50여 년을 정부의 지원 없이 이동파가 지속할 수 있는 데에는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인층과 상류층, 사업가들의 도움이 있었다. 희곡 작가 체호프도 가난한 이동파 화가들에게 자신의 별장에서 몇 달이고 쉬면서 작업에 열중하도록 제공하기도 하고 작품 판매를 도왔다고 한다.

그중 사업가 파벨 트레챠코프와 세르게이 트레챠코프 형제는 이동파 화가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훗날 자신들의 집과 수집한 작품들을 모두 모스크바시에 기증하여 세운 트레챠코프 미술관으로, 온 러시아 국민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은 이동파의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작품을 구입하고 전시회와 화가들의 작품 생활을 지원하면서 그들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동파 화가들에게는 ‘차르(tsar)’ 보다 더 위에 있다고 하는 트레챠코프 형제, 이들이 밝은 색깔의 물감이 비싸서 어두운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던 가난한 작가 레비탄의 작품을 시가의 몇 배 가격으로 구입했다는 일화는 그들이 어떻게 이동파를 지원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훗날 파벨 트레챠코프는 수집한 작품들을 모두 기증하며 ‘미술관을 영원히 그리고 무료로 개방할 것, 부활절과 성탄절, 설날을 제외하고는 일주일에 4일 이상 문을 열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한다. 1856년 ‘트레챠코프 미술관’이 세워질 당시에 이 미술관이 가진 소장품은 형제의 기증품인 5천 점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림만 친다면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 박물관보다 많은 10만 점이 넘는다.

트레챠코프 형제로 시작된 기증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무런 보상 없이 진귀한 회화까지도 기증하는 이 전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추운 겨울에도 휴일 관람객이 하루 5만 명이 넘는 문화 강국 러시아의 한 문화 관계자에게서 이유를 엿들을 수 있다. “후손들의 좋은 미래를 위해 예술과 문화에 투자하십시오. 문화만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나가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시대적 고통을 러시아 화가들은 진실된 시선으로 화폭에 선명히 그려내며 혹독한 삶을 살아가는 러시아 민중과 함께 아파하고 쓰다듬어 이겨내게 했다. 그것만이 예술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라 단언하며 시대를 대변하는 그림으로 민중의 아픈 삶을 담는 그릇이 된 이동파의 작품들은 민중의 가슴을 녹이며 지금도 깊이 사랑받고 있다. 궁중과 미술관의 화려하고 견고한 벽을 차고 나와, 민중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되도록 그들 속으로 들어가 견인했던 이동파는 후세에게 예술의 현실 세계가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이후에 나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일부 프로파간다 예술로 흐르며 권력과 예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지만, 멕시코의 벽화운동, 독일의 케테 콜비츠, 중국의 판화 운동, 그리고 우리 나라의 민중미술, 거리예술, 최근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아트와 다양한 공공예술까지, 대중과 현실 세계라는 예술의 장에서 펼치는 예술가들의 작업은 이어지고 있다.

글. 그림 제공. 최대주 (화가)

6180daeju@hanmail.net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Barge Haulers on the Volga), 131×281, 캔버스 위에 유화, 1870-73,
ⓒ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

 

근위병 처형의 아침 (Morning of Streltzis execution), 218x379cm, 1881
ⓒ 바실리 수리코프 (Vasily Ivanovich Surikov)

 

1861년 선언문읽기
(Reading of the 1861 Manifesto) (1873)
ⓒ 그리고리 미야소예도프
(Grigoriy Grigorievich Myasoyedov)
농부들이 유일하게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의 주변에 모여서 농노제폐지 선언문을 듣고 있는 모습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 Workmen Carrying Water) (1866)
ⓒ 바실리 페로프
(Vasily Grigorevich Perov)
아동노동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이 그림은 ‘트로이카’(러시아를 이끌어가는 상징적 의미의 삼두마차)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현실을 비유한다. 지치고 쓰러질 듯한 세 명의 아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가운데의 아이는 빠진 앞니로 7~8세 정도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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