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980년 봄, 그리고 광대

광주 1980년 봄, 그리고 광대

1980년이었다. 1979년 10월에서 몇 개월이 지났고 1980년 5월은 짐작할 수도 없었던 날이었다. 3월 15일이었고 토요일이었다. 모두가 추운 겨울을 이겨낸 봄날의 따스한 생명력을 찬미하던 날들이었다. 독재자는 죽었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토요일, 오후 3시와 7시. 사람들은 광주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YMCA무진관으로 마당극 한판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극회 광대의 창립공연 <돼지풀이〉.

극단 광대의 창립공연이라지만 마당극 한판만 올려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돌려진 팜플렛에 쓰여진 정식 타이틀은 ‘광대 창립 기념문화제’였다. 문화제답게 광대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김영동의 대금산조, 서울 메아리 합창단의 합창, 임진택의 판소리, 양희은의 노래로 구성되었고, 광대의 <돼지풀이〉는 피날레였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날 문화제에 함께했고 맥없이 죽어간 돼지들의 혼령과 패배로 끝날게 뻔했던 농민들의 설움과 분노와 숙연함이 한 데 뭉뚱그려지며 오지게 돌아가는 세상과 한판 대결할 기운을 나누며 헤어졌다. 그래도 역시 바람 불어 좋은 봄날이었다.

두 달 후, 광대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름깨나 알려진 서울문화운동 그룹의 우정 출연도, 행사를 주관해주던 내로라하는 선배들의 지원도 없이 오로지 맨몸뚱이로 관객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들이 개관기념공연으로 준비하던 <한씨연대기〉도, 한참 무대 공사를 하던 ‘동리 소극장’도 아닌 도청 앞 광장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다. 실내가 아닌 실외, 극장이 아닌 광장에서, 배우와 관객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광장의 중심 분수대 위에 베니어판 몇 장으로 대충 무대와 계단을 만들고 버스에서 뜯어온 앰프와 스피커를 전파사를 운영하는 시민의 도움으로 설치한 것이 무대의 전부였다. 배우와 연출은커녕 무대도 대본도 없었다.

무대는 광주였고, 대본은 지난 며칠 동안 모두가 목격한 진실이었으며, 배우와 연출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계엄군이 퇴각한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민주시민궐기대회’의 시작이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26일은 오전 죽음의 행진까지 총 두 차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극장 정치와 같은, 하나의 거대한 마당극과 같은 민주시민궐기대회에서 광대 단원들은 누구의 지시도 조직적인 결의도 없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문안을 작성하고 소도구를 제작하고 시민들과 함께 부를 노래를 개사하고 무대에 오르는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궐기대회 후 가두시위를 진행하고 밤이 되면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등 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 광대 단원들은 신명을 다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발동된 계엄령의 예비검속으로 실상 광주의 재야, 학생운동의 지도층들은 모두 구속되거나 도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항쟁 기간, 그들의 자리를 메운 사람들이 극회 광대, YWCA, 송백회, 들불야학 등이었다. 물론 항쟁의 시작과 끝은 광주 시민들이었다.

계엄군에 포위당한 전시 상황에서 둥그렇게 모여 공동체에 벌어진 비극을 애도하고 항쟁의 의미를 숙고하고 토론하며 직접민주주의로 광주의 미래를 결정한 것이 민주시민궐기대회였다. 그래서 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총을 버리지 않았고 광주는 영원히 살 수 있었다.

1년 후 5월 9일 YMCA무진관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번에 경찰들도 건물 전체를 수 겹으로 에워싸며 모여든다. 연암 박지원의 「호질」을 각색한 <호랑이 놀이〉는 상당히 우회적 표현에도 5월 항쟁 1주년을 애도하고 비극의 배후조정자가 미국임을 폭로하는 마당극이었다. 극회 광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잔인한 봄날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모두가 수배와 도피에, 감옥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존재의 죄스러움으로 가득한 날들, 지옥의 시작이었다. 사랑할 땐 몰랐던 서로의 직업이 나이가 학벌이 취향이 눈에 거슬린다. 타인의 눈물에서 보았던 뜨거운 이성의 힘은 다시 외롭고 고독한 자기만의 합리화로 전락해간다. 사랑이 끝난 후 도둑처럼 다가오는 현실의 비겁한 초라함을 버텨낸 사람들. 그래서 지독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도시, 광주가 탄생한 것이다.

추신

2017년에 나는 윤수안 형과 함께 극회 광대 결성에 참여한 윤만식(1952년생), 김선출(1958년생), 전용호(1958년생), 김태종(1959년생)을 『1970년대 광주 문화운동과 518의 기억』이라는 주제 하에 구술 연구를 진행하였다. 5월 당시 민주시민궐기대회 사회를 본 김태종은 윤상원 박효선 등이 활동한 전남대 연극반이었다.

그들은 모두 1978년 전남대 탈춤반 창립과 전라도 최초 마당극이라 불리는 1978년 <함평 고구마〉에 참여한 광주 문화운동 1세대이다. 5월이 끝난 뒤에도 1982년 <임을 위한 행진곡>녹음, 1982년 극회 광대의 후신인 ‘놀이패 신명’ 창립,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원고 작성 등 광주 문화운동 전면에서 활동한다.

광주 문화운동은 서울문화운동과의 적극적인 교류에 의해 시작된다. 전남대 탈춤반 결성에 자극이 된 1977년 해남 농민 추수감사제에서 황석영, 김남주 등의 주도로 벌어진 서울 문화패 <한두레>의 마당극 공연과 그해 겨울 광주 YMCA에서 열린 채희완, 김봉준, 유인택 등의 열정적인 탈춤 강습 등이다.

그러나 5월 이후 광주문화운동은 서울문화운동과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극회 광대의 창립식까지 서울 문화운동그룹의 자장안에서 머물던 그들은 5월을 겪으며 강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전투적 신명론을 뚜렷이 드러낸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8일까지 정치적 해빙기의 문화예술작업들을 더욱 소상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쿠테타 사이,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시기처럼 말이다. 괄호안의 공백처럼 비워진 시간과 공간에 주목하다 보면 한국현대문화의 본심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 한재섭 (미술사)

badland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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