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2

발문 2

몇 년 전 양림동 펭귄 마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는 사진작가님이 광주에서 꼭 들러봐야 한다는 곳이었습니다. 도착한 그곳엔 마을 촌장님과 주민들이 폐품과 생활용품들로 꾸민 ‘정크 아트’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한 어르신이 뒤뚱뒤뚱 걷는 모습에서 이름에 착안했다는 ‘펭귄마을’. 본래는 마을 한쪽에 화재로 전소된 집주변이 폐허가 되고 쓰레기로 넘쳐나게 되자, 다시 재활용품으로 마을 곳곳을 가꾼 삶과 예술이 함께 엉켜있는 곳입니다. 마을 초입 상점 한쪽에서 작은 스튜디오를 꾸리고 그림을 그리던 한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큰 눈망울로 빛을 발하는 얼굴의 그림은 ‘어린왕자’를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세속을 잊어버리라는 듯,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존재에 말을 걸었습니다. 작가의 스튜디오는 마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궁금했습니다.

펭귄마을이 있는 양림동은 이미 문화적으로도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광주의 근대문화의 시작점이기도 한 양림동의 기독교 문화공간과 옛 한옥들이 작은 스튜디오로 미술관으로 카페로 변화하면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세상에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주민이 스스로 만든 정크 아트와 문화가 있는 펭귄마을은 근대문화를 주축으로 한 양림동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결의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1년 즈음 지나 펭귄마을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논란 이후에 문화공원으로 존치되고, 일부 집을 ‘리모델링’하여 마을 공동 카페와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펭귄마을의 재개발 소식에 안타까워했지만, 모두의 바람이 통했는지, 다행히 문화공원이 조성되고 마을 협동조합도 생기면서 마을은 더욱 활성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작가님이 작업실을 접게 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있던 어느 화가의 작업실은 이제 볼 수 없습니다.

예술이 삶의 근처에 있으면서도 고립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삶 속의 문화와 예술은 함께 만나기 어려운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소리로서의 예술과 관 주도의 예술 그리고 상업 행위로서의 예술의 몇 가지 형태는 사회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어떤 쓰임을 갖지 못한 예술은 매우 외롭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에서의 예술은 그 창작과 향유의 과정에서 그 ‘문화’의 방식이 다른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예술을 도구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저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가치로운 일이면서도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술은 무엇일까요? 예술은 우리 곁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질문합니다.

<행진:지역공연예술비평플랫폼 2>는 지역에서의 예술의 존재 방식에 질문하면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주목합니다. 지역에서의 예술의 존재 방식을 계속해서 다룰 예정입니다. 2019년을 시작하며 지역에 바라는 글, 매일, 매월, 매 해를 삶과 예술 활동으로 지속하고 있는 예술가들,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아무도 없지만 예술이 좋아 그저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다양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획자, 활동가들, 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존재 방식과 관계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마지막으로 김신윤주 작가의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2’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예술이 존재하는 ‘텃밭’을 가꾸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곳에 ‘지역’의 역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틈을 꿈꾸어 봅니다.

지금의 시대,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 제국의 경제적 구조와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생명 정치의 시대는 경쟁과 속도에 휩쓸려서 무너진 공동체 의식과 작은 생명들에 대한 감수성을 돌아볼 틈을 주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의 생존권을 틀어쥔 기획되고 보여주기 식의 특화된 문화 예술 사업은 극소수의 예술가만 이 살아남는 신자유주의 자본 시장의 구도 그대로 예술의 경쟁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번뜩이는 영감과 특이한 시각으로 무디고 단단한 사회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낯선 숨을 불어넣어 새로운 호흡 을 일으키던 예술은 아사의 궁지에서 자진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이 획일화된 메트릭스의 시대에서 이 제 지역은 인류 문명을 살리고 도리어 예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중요한 거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김신윤주, <보이지 않음을 위하여 2>

글. 임인자 (발행인/편집장)

daeinz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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